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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소설=허구보다는 자전=사실이 강력하다.책 2013. 5. 11. 15:01반응형
5.6. - 5.7.
박완서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소설=허구보다는 자전自傳=사실이 더욱 강력하다
워낙 유명한 책이기에 알고 있었다.만 만날 기회가 없었다. 너도나도 읽는 책이니까 읽고 싶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에 읽었더라면 내 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모두 알다시피 MBC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선정도서이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밤늦게 TV를 볼 수 없었다. 부모님께서 21:00면 주무시는 까닭도 있었지만 내가 너무 어렸기에 늦게까지 TV 시청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았다. 그 시간에 자극적인 프로그램이 많았고, 대부분 15세 이상 시청이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것을 무척 따르는 편이었다. (그래서 15살이 되었을 때 무척 기뻤다.) 또 조금만 지나면 유선 방송에서는 성인 영화를 하는데, 부모님께서는 내게 지금까지도 그런 부분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나마 내가 당당히 TV를 볼 수 있었던 프로그렘은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였다. 더구나 기억으론 금요일이나 토요일 10시 이후에 방송했었다. 그래서 나는 이 핑계로 TV를 볼 수 있었다. (물론 채널을 돌려가며 보았다.) 나는 10년 전부터 이 책을 알고 있었다.
싱아.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싱아가 열매인 줄 알았다. 이름에서 느껴지는 시큼한 느낌에, 청포도보다 조금 작고 불그스름한 열매인 줄로 알았다. 가끔 길가다가 보이는 붉은 열매가 싱아가 아닐까 몇 번 상상했다. 놀랍게도 싱아는 붉은 색이 아니었고 더더욱 열매도 아니었다. 싱아는 식물 이름으로 줄기나 잎을 먹는 것이었다.
아쉽게도 박완서 작가님은 2011년 작고하셨다. 신문의 첫 지면에 실릴 정도의 일이었는데 나로서는 도저히 감흥이 없었다. 수많은 소설가가 글을 쓰고 운명에 따라 떠나는 것인데 그게 그렇게 큰일이던가. 사람은 관심 있는 것만 보이고 경험한 것만 느낀다더니 작가님의 책을 읽고 나니 세상의 별이 지고 거인이 쓰러졌다는 느낌이 오늘에서야 든다. 왜 그렇게 많은 독자와 작가들이 슬퍼했는가, 지금은 알았다.
앞서 (다른 감상문에서) 밝혔듯이 작가의 말과 역자 해설을 읽고 목차로 소제목을 읽은 뒤에 작품을 읽는다. 그리고서 <작품 해설>을 읽는다. 아니 읽는 경우도 더러 있다. 작가의 말을 읽으며 소설에 무언가 있겠거니 느껴졌다. 나는 이러한 자기 고백적 요소가 포함된 소설을 좋아한다. 그리고서 목차를 읽었는데 전형적인 기승전결 헤피엔딩형 서술이구나 생각되었다. <9. 패대겨쳐진 문패>에서 갈등이 고조되다가 <10. 암중모색>에서 갈등 해결의 실마디가 보이고 <11. 그 전날 밤의 평화>에서 마무리가 되어 <12. 찬란한 예감>에서 행복한 결말을 가지겠구나!
이 소설은 주인공이 성장하며 세상에 대한 관점과 가치관을 쌓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나는 소설보다는 자서전으로 읽었다. 글에서 생명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묘사나 은유에 특이하거나 특별함은 없었다. 무난하다. 그런 무난함 속에 리듬이 느껴진다. 어둠과 슬픔 그리고 밝음과 기쁨이 명확하다. 그래서 생명이 느껴진다. 손을 놓으면 생명이 죽을까 봐 계속 잡고 있어야 한다. 계속 읽게 된다. 이 가족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떻게 살아남아 이 글을 이런 방식으로 서술해 낼 수 있을 것인가.
개인적으로 반전을 느껴서인지 <12. 찬란한 예감>이 인상깊다. 6.25의 애환, 이데올로기전의 폐해. 특히나 정부의 말을 믿고선 서울에 남아있다 피해를 입은 선량한 양민들도 이데올로기의 피해자 중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너무나 가슴시리도록 인상깊다. 이 슬픔이 박완서라는 거인을 키워낸 자양분이다.
p. 269.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나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나는 가끔 이런 <찬란한 예감>을 느끼곤 한다. 다른 누군가가 증명할 수 없는 나만이 바라보는 세상. 나는 그걸 써보고 싶다. 그런 욕구가 생긴다.
p. 91 그러나 만약 그때 엄마가 내 도벽을 알아 내어 유난히 민감한 내 수치심이 보호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민감하다는 건 깨어지기가 쉽다는 뜻도 된다.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못된 애가 되었을 것이다. 하여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는 동안에 수없는 선악의 갈림길에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 마음과 관련된 내용.
p. 138. 개성역 앞 광장에 반끼리 줄을 서서 인원 점검을 할 때였다. "완서야, 완서야."하고 내 이름을 크게 부르는 소리가 났다. 저만치서 할머니가 무법자처럼 아이들 사이를 마구 헤집고 다니면서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숙모도 아니고 할머니였다. 어찌나 창피한지 잠시 꺼질 수 있는 거라면 꺼지고 싶었다.
p. 181. 그때 그때 흥미본위로 잡다하게 취한 지식은 전혀 두서가 없어 꼭 정리를 안 하고 함부로 처넣은 서랍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야말로 잡식에 머물러 있다.
5.7.
진실로 오랜만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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