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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란 쿤데라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2. 09. 27.)
    2012. 11. 24.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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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저자
    밀란 쿤데라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09-12-2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20세기 최고의 작가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을 만나다! 민음사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밀란 쿤데라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2. 09. 25. - 12. 09. 27.

     

     

     

     

     

     

     

     

    빠르고 급하고 Story중심의 파악

    느리고 음미하며 하고자하는 바를 떠올리며.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질문.

     

    3부 중간까지 책을 읽고 이해가 잘 안되서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포스트잇에 위의 글을 써 놓고 표지에 붙이고선.

    궁극적으로 조금이나마 소설을 이해한 것은 다시 읽은 3장까지. 그 이상은 아직 이해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너무 깊고, 심오하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지, 정치·사상에 대한 이야기인지, '키치'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인지. 실화인지 소설인지. 토마시 · 테레자 · 사비나 · 프란츠 모두 실존하는 듯하다. 하지만 글에서 작가가 계속 밝히듯이 소설가의 머리로부터 나온 인물들이다. 이렇게 다른 성격의 캐릭터를 내면까지 깁숙하게 표착하여 묘사하였는지.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 등장인물의 심리묘사 등 너무 잘 맞아 떨어진다. 이것이 진정 소설인가.

     

    작품 중간에 '소설적'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나온다. 우리의 삶은 소설적인가-.

    끊임없는 우연들의 산물. 그것이 우리인가. 우연들이 선택한 우리들의 필연. 그것이 가치인가.

     

    p.12

    우리 인생의 매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든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 될 것이다. 이런 바상은 잔혹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의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러나 묵직함은 진정 끔찍하고, 가벼움은 아름다울까?

    가장 무거운 짐이 우리는 짓누르고 허리를 휘게 만들어 땅바닥에 깔아 눕힌다. 그런데 유사 이래 모든 연애 시에서 여자는 남자 육체의 하중을 갈망했다. 따라서 무거운 짐은 동시에 가장 격렬한 생명의 완성에 대한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 - 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미묘하다.

     

    이 책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가벼울 것인가, 무거울 것인가. 자유로울 것인가, 짐을 져야 할 것인가. 배신할 것인가, 책임질 것인가. 무거움은 영원한 짐이되지만, 오히려 그 짐으로 인해 우리가 진정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p. 16

    진정한 남자라면 당장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이지만 그는 머뭇거리면서 자기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그녀가 죽으면 자기도 따라 죽으리라 확신하고 여자 발치에무릎을 꿇은 순간)으로부터 모든 의미를 박탈하는 자신을 책망했다.

    그는 한없이 자책하다가 결국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만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 번밖에 살지 못하고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도 없으며 현생과 비교하여 후생을 바로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테레자오 ㅏ함께 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혼자 사는 것이 나을까?

    도무지 비교할 길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정이 좋은지 확일할 길도 없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 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은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토마시는 독인 속담을 되뇌었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 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선택에 주저하는 사람의 모습, 그리고 그 이유를 논리있게 파해쳤다. 이 선택이 틀리면 어쩌지? 게임처럼 세이브할 수만 있다면 좋을텐데.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러지 못한다. 인생은 단 한번이다. 리허설 없는 실전의 무대. 그렇기에 더욱 무겁다. 한 번의 실수는 돌이킬 수 없기에-

     

    p.50

    그와 테레자의 사랑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피곤하기도 했다. 항상 뭔가 숨기고, 감추고, 위장하고, 보완하고, 그녀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하고,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증명하고, 질투심과 고통과 꿈에서 비롯된 비난을 감수하고, 죄의식을 느끼고, 자신을 정당화하고, 용서를 구해야만 했다. 이제 피곤은 사라지고 아름다움만 남았다.

     

    내가 겪은 이별의 과정과 동일하다. 그 때가 '아름다웠음'을 기억하는 것은 그 때의 '피곤함'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가면 잘할 수 있을텐데...라고 다짐하는 것 역시 그 피곤함들을 잊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경험이 특수한 것인지 보편적인 것인지는 문학을 통해 알 수 있다. 삶의 보편성을 문학을 통해 소화할 수 있다는 것과 매 순간을 절묘하고 객관적이게 표착한 것이 대단하다. 나는 화자가 '나'같음으로 몰입하게 된다. 이게 이 소설의 매력이다.

     

    p.57

    잠든 테레자 곁에서 뒤척이다가 몇 년 전 그녀가 무심코 던진 말이 떠올랐다. 그들이 친구 I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그녀가 말했다. "당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틀림없이 그를 사랑했을 거야."

    당시에는 그 말을 듣고 토마시는 야릇한 우울함에 빠졌더랬다. 테레자가 그의 친구 I가 아닌 자기와 사랑에 빠진 것은 철저히 우연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사랑이란 뭔가 가벼운 것,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무엇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런 것이어야만 한다고 상상한다. 또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도 더 이상 삶이 아닐 거라고 믿는다. 덥수룩학 머리가 끔찍한, 침울한 베토벤도 몸소 그의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을 우리의 위대한 사랑을 위해 연주했다고 확신한다.

    토마시는 그의 친구 I에 대해 테레자가 한 말을 떠올리고 그들의 사랑의 역사는 'Es muss sein!'이라기보다는 'Es konnte auch anders sein(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에 근거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p.80

    그런데 어떤 한 사건이 보다 많은 우연에 얽혀 있다면 그 사건에는 그만큼 중요하고 많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 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그 무엇일 따름이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 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필연과는 달리 우연에는 이런 주술적 힘이 있다. 하나의 사랑이 잊히지 않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성 프란체스코의 어꺠에 새들이 모여 앉은 첫 순간부터 여러 우연이 합쳐져야만 한다.

     

    p. 142

    사비나의 삶이 음악이었다면, 중산모자는 그 악보의 모티프였다. 이 모티프는 영원히 되풀이되었으며 매번 다른 의미를 띠었다. 그 모든 의미는 마치 물이 강바닥을 스치고 지나가듯 중산모자를 거쳤다. 그리고 내 생객에 그것은 헤라크레이토스의 강바닥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물에서 두 번 목욕하지 않는다!' 중산모자는 강바닥이었고, 사비나는 매번 다른 강물, 다른 의미론적 강물을 보았던 것이다. 같은 대상이 매번 다른 의미를 야기했지만 그 의미는 이전의 다른 모든 의미와 공명을 일으켰다. 마치 하나의 메아리. 꼬리를 무는 메아리들처럼. 새로운 체험은 보다 풍부한 화음으로 공명을 일으켰다. 취리히의 호텔 방에서 그들은 중산모자를 보고 감격했고 거의 울면서 사랑을 나눴는데, 그 검은 물체가 단지 그들 사랑 놀이의 기념품일뿐만 아니라 자동차나 비행기도 없던 시절에 살았던 사비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자취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제 아마도 사비나와 프란츠를 갈라 놓은 심연을 보다 잘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그녀가 그녀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탐욕스럽게 귀담아 들었고, 그녀 역시 그의 말을 똑같이 탐욕적으로 들었다. 그들은 그들이 서로에게 했던 말이 논리적 의미는 정확하게 이해했으나 이 말 사이를 흘러가는 의미론적 강물의 속삼임을 듣지 못했던 것이다.

    사비나가 그 앞에서 중산모자를 썼을 때, 프란츠는 마치 누군가가 미지의 언어로 그에게 말을 거는 것 같은 불편함을 느꼈다. 그는 이 행동이 음탕하거나 감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의미의 부재로 인해 그를 당황케 하는 난해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쾌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 (토마시와 사비나가 중산모자의 모티프를 서로 나눠 가졌든)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ㅈ어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을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내가 사비나와 프란츠 사이에 난 모든 오솔길을 되짚어 본다면, 그들이 작성한 몰이해의 목록은 두려운 사정이 될 것이다.

     

     

    사랑의 단상에서 읽었듯이, 우리는 사랑을 해석하려고한다.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만, 우리는 서로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 떄문에 이성적으로는 이해 되지만, 감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구나.

     

    p. 381

    우주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저절로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간의 논쟁은 우리의 직관과 체험을 넘어서는 무엇인가와 관련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존재 그 자체 (어떻게 누구에 의해 주어졌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를 의심하는 사람과 주어진 존재에 아무런 조건 없이 동의하는 사람들 간의 견해차도 이와 마찬가지로 엄존한다.

    그것이 종교적 믿음이건 정치적 믿음이건 간에 모든 유럽인들의 믿음 이면에는 창세기의 첫 번째 장이 존재하며, 이 세계는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모양으로 창조되었고, 존재는 선한 것이며 따라서 아이를 가지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거기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근본적 믿음을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라고 부르도록 하자.

    최근에도 책 속에서 똥이라는 단어가 점선으로 대체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윤리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똥이 비윤리적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똥과의 불화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똥을 누는 행위는 창조의 받아들이기 어려운 성질을 일상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똥을 수락할 만한 것이라거나 (그렇다면 화장실 문들 잠그고 들어앉지 말아야 한다) 또는 창조된 방식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 중에서.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불린다.

    이것은 감상적이었던 19세기 중엽에 생겨나 그 이후 다른 모든 언어에 퍼졌던 독일어 단어다. 그러나 그 단어를 자주 사용함에 따라 그것이 지난 원래의 형이상학적 가치가 지워졌는데, 말하자면 키치란 본질적으로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문자적 의미나 상징적 의미에서 그렇다. 키치는 자신의 시야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키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이해되지 않는다. 반드시 한번 더 읽어야지.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무거운 존재는 토마시·테레사, 가벼운 존재는 사비나·프란츠이다. 하지만 둘 모두, 가볍든 무겁든 고통받는다. 특히 테레사는 지나친 무게감에, 사비나는 지나친 가벼움에 현기증을 느낀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현실을 현실로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란 공간은 현실적이다. 내가 살아가고, 살아갈 곳이므로-. 그러나 일탈의 경우는 일상이 아니라, 현실의 무거운 짐을 어깨에서 내려놓는 것이다. 그렇기에 일탈은 언제나 유쾌하고 즐겁다. 가볍기 때문에. 일상을 버티지 못하고 계속되는 일탈은 내 어깨의 짐을 모두 내려놓을 것이고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나를 하늘 위로 올려보낼 것이다. 내 존재도 가벼워진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우리가 매일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똥울 누는 행위, 이런 일상적인 일을 부정할 수 있는가. 이러한 부정이 키치인 것인가.

    현실적인 것은 무겁고, 비현실적인 것은 가벼운 것인가.

    무거운 것이란 "그래야만 한다!"라고 한다. 필연적이고- 일상적인 것-. 하지만 우연의 누적은 필연이라 할 수 있다. 가벼움이 모이면 무거움이 되는 것인가? 아직 이것에 대해 잘 모르겠다. 더 살아보면 알겠지?

     

    '존재'. 아직은 좀 더 무거운 존재이고 싶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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