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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 자기 식대로 산다는 것책 2013. 6. 22. 15:56반응형
5.29. - 5.31.
법정스님 - 「산에는 꽃이 피네」
자기 식대로 산다는 것.
나는 종교가 없다. 급하고 당황스러우면 부처님·하느님·알라를 다 찾지만 신앙은 아니다. 그분들이 전해준 말씀은 값지다 생각지만 믿을 순 없다. 아직 스스로 잘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친근한 종교는 불교이다. 어머니께서 불교에 강한 믿음을 가졌고, 의지하고 계셔서 익숙하기도 하지만 특유의 자기 수행이라는 향기와 인연설 등이 관심이 있다. 책을 읽고 불교에 많은 관심이 생겼는데 다름 아닌 한 문구 덕분이다.
*불교는 부처를 믿는 종교가 아니다. 스스로 부처가 되는 길이다.
많은 경전이 부처가 되는 법을 설파하는데 그 다양한 경전은 사실 자신의 마음속에 지니고 있던 불성을 일깨우는 촉매제일 뿐이다. 답은 스스로 가지고 있다. 주체성을 가지고 몸과 마음을 디자인하라는 말이다. 자기 수행을 위한 계속되는 정진正進. 자신과 만나기 위한 명상과 타인에게 베풀기 위한 자비. 방법을 중요치 않다. 진정한 자신과 만날 수 있는 길이면 된다.
98년도에 출간된 책이다. 유독 소유에 대한 선문禪文이 많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IMF 위기가 닥친 시기였다. 끝없이 소비만하고 경쟁하고 소유하고 이기적인 시기. 물론 지금도 그러한 풍토는 남아있다. 글쎄 집에 택배가 쌓여 깔려 죽은 사람도 있지 않은가.(언젠가 TV 기사로 본 것 같은데 찾아봐도 나오지 않는다.) 스님은 단순하고 간결한 삶을 말씀하신다. 우리가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물이 우리를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필요해서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욕구가 생겨 (불필요함에도) 소유하는지 스스로 판단해봐야 한다. 최근에 무료해서 나는 웹게임을 심심찮게 했었다. 스토리도 없고 디자인도 변변찮은 삼류 게임. 오직 그 게임의 목표는 많이 소유해서 강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소유할 대상이 업데이트되고 결국 끝이 없는 진행이 이어진다. 게임을 하면서도 내가 왜 여기에 집착할까? 벗어나지 못할까? 자문했다. 그러나 그만둘 수 없었다. 접속만 하면 주는 무료 아이템과 지금까지 투자한 시간이 계속해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생각한다. 분명 내게 재미를 주는 것도 아니고 성취감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1년 뒤에 계속할 것인가? 절대 아니야. 라고 게임을 안 해도 되는 이유가 끊임없이 생각난다. 책을 읽고 소유물에 내가 소유당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책을 많이 보더라도 행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래서 나는 어제부로 삭제를 했다.
여전히 머릿속에 떠오른다. 어제 했으면 아이템을 얻었을 터인데. 다시 한 번만 들어갈까…. 그래도 해온 시간이 있는데. 계속 사소한 변화를 바꾸려는 욕망이 들쑤신다. 불교에서 '사바세계'는 참고 견디는 세계란 의미이다. 세상은 참고 견디는 곳이고 거기서 의미와 아름다움이 피어나는 것이다. 스스로 관습과 타성에 젖어 녹이 쓴 부패한 곳을 닦고 쓸어버려 청정하게 만들어야지.
왜 스님이 됐는가? 라는 질문에 법정 스님은 세상이 무상해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절대 말씀하시지 않았다. 스님은 '나는 나대로 살고 싶어서, 내식대로 살고 싶어서 출가했다.' 도대체 <나>로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책을 읽으며 <비움>에 대해서 계속 떠올랐다. 가장 먼저 단순하고 간소하게 사는 것이다. 책에서만 대여섯 번 나온다. 적게 보고, 적게 먹고, 적게 듣고, 적게 말하는 것. 삶을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단순함과 간소함으로 판별 기준은 바로 <필요냐 욕망이냐>이다. 진정 필요한 것만 가지고, 한 개만 있으면 되는 것을 두 개 가지지 않음으로써 소유물에 소유 당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살아가며 계속해서 붙잡히는 지푸라기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가지는 것만이 아니다. 말하는 것도 그렇다. 무라카미 류의 「무취미의 권유」에 나오듯이 목표는 밖으로 말할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봉인해두어야 한다. 목표를 입으로 배출하면 마음속에서 무르익어 내실이 되어야 할 것이 빠져나가 빈 껍데기만 남게 된다. 나도 그렇다. 웹게임을 접어야지 접어야지 말하면서도 몇 주간 실패했다. 어제 결심을 하고서 내 의지를 타인에게 말하지 않았다. 스스로 목표의 감독관이 되어 채찍질하고 달래야 한다. 목표는 자신의 가슴속에서 무르익어야지 말을 많이 해서는 안된다. 말 역시 필요한 말만 해야한다.
그래서 침묵이 중요하다. 적절한 침묵은 계속되는 외침보다 강력하다. 웃음에도 침묵이 있고 비판에도 침묵이 있다. 침묵 없는 미소와 비판은 의미가 퇴색되고 진실성이 의심받는다. 울림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침묵이라는 텅 빈 충만이 메아리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소리에만 침묵이 있는 것이 아니다. 행동에도 침묵이 있다. 유하게만 행동하던 사람의 적극성이 큰 울림을 주듯이.
침묵 역시 비움이다. 나는 사람과 만나며 큰 울림을 주고 싶었다. 내 존재의 진동이 그 사람에게도 전해져 파장을 만들고 싶었다. 그 방법론에 대해서는 수많은 방법이 제시된다. "그 사람의 손짓을 통해 심리를 알 수 있다. 그 사람의 상황에 맞춰 행동하고 공감하라. 밀땅이 중요하니 잘해주다가 팅겨내라." 불교로 치자면 부처가 되는 수많은 경전일 뿐이다. 그 방법이 유효할진 몰라도 그 정도일 뿐이고 내 상황에도 맞지 않는다. 답은 스스로 알고 있을 것이다. 스스로 아는 답과 세상이 말하는 소음 중에 줄다리기할 뿐이다. 그래서 복잡해지고 의미가 줄어든다. 상대에게 호감을 얻기 위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담아 울림을 전해야 한다.
p.83. 거듭 말하지만 무엇보다도 단순한 삶이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을 거듭거듭 안으로 살펴봐야 한다.
내가 지금 순간순간 살고 있는 이 일이 인간의 삶인가, 지금 나답게 살고 있는가, 스스로 점검을 해야 한다.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엇을 이룰 것인가를 스스로 물으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누가 내 인생을 만들어 주는가. 내가 내 인생을 만들어 갈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다. 저마다 자기 그림자를 거느리고 휘적휘적 지평선 위를 걸어가고 있지 않는가. 자기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각자의 짐이나 그림자나 꽃을 지고 살아간다. 참고 견디는 세상에 살고있다. 그리고 참고 견딜만한 곳이다.
분명 법정스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긴 어렵고, 스님도 그걸 바라진 않을 것이다. '바로 지금이지 그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항상 스스로 어디있는지 돌아보고 마음을 깨끗하고 단순하게 하도록 노력해야겠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말이 아닌 뜻을 보라!
5. 31.
問修思
p. 27. 때로는 전화를 내려놓고, 신문도 보지 말고, 단 십 분이든 삼십 분이든 허리를 바짝 펴고 벽을 보고 앉아서 나는 누구인가 물어보라.
이렇게 스스로 묻는 속에서 근원적인 삶의 뿌리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문명의 커다란 이기로부터 벗어나 하루 한 순간이라도 순수하게 홀로 잇는 시간을 갖는다면 삶의 질이 달라질 것이다.
p. 58. 자신의 근심과 걱정을 밖에서 오는 귀찮은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삶의 과정으로 생각해야 한다. 숙제로 생각해야 한다. 자신에게 어떤 걱정과 근심거리가 있다면 회피해선 안 된다. 그걸 딛고 일어서야 한다. 어떤 의미가 있는가. 왜 이런 불행이 닥치는가. 이것을 안으로 살피고 딛고 일어서야 한다.
저마다 이 세상에 자기 짐을 지고 나온다. 그 짐마다 무게가 다른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 나온 사람들은 남들이 넘겨볼 수 없는 짐을 지고 있다. 그것이 그 인생이다. 따라서 세상살이에 어려움이 있다고 달아나서는 안 된다. 그 어려움을 통해서 그걸 딛고 일어서는 새로운 창의력을, 의지력을 키우라는 우주의 소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p. 118. '진리는 하나인데 현지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
기독교적인 사랑과 불교의 자비는 사실 똑같은 것이다. 사랑은 가볍고 자비는 무거운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문화적인 배경과 지역적인 특수성에서 다른 표현이 생겨난 것일 뿐이다.
그 말을 통해서 우리의 삶으로 바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 말 자체에 집착하게 되면 뜻은 놓치고 모순에 빠진다.
'말을 따르지 말고 뜻을 따르라.'
p. 164. 거듭 말하지만 하나가 필요할 때 둘을 가지려 하지 말라. 둘을 갖게 되면 그 하나마저 잃게 된다. 모자랄까봐 미리 걱정하는 그 일므이 바로 모자람이다. 그것이 가난이고 결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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