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의 「순간의 꽃」(작은 시집), 이름도 없는 작은 녀석들의 합주

 

 

 

 

 

 

 

5.13. - 5.14.

고은 - 「순간의 꽃」(작은 시집)

 

 

 

 

 

 

 

 

이름도 없는 작은 녀석들의 합주.

 

 4월 초, 이 시집을 읽었다. 그러나 감상문을 쓰지 않고 다이어리에 좋은 시편 몇 기록해두고 덮었다. 시집이 나빠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당시에는 순간의 미학에 빠져있었다.

4. 4. Diary 中. 흔들리는 나룻배처럼 여기저기 흔들린다. 그런 시기가 왔다. 그것이 물결에 흔들리는지, 바람에 흔들리는지 모르겠다. 물결은 마음에서 나오는 진동이다. 그 단단치 못한 것이 흔들바위마냥 휘청여 강물이 요동친다. 바람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타인의 바람Wish이다. 그 사람이 원하는 내 모습이거나, 그 사람이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그 생각에 감염되고 만 것이다. 사람은 원래 나룻배 같은 존재인가. 

  이런 생각들. 참 오래도 품고 살아왔다. 어느 정도 돌파구를 찾았다 생각하면 어느새 다시 빠져들어 있다. 발버둥 칠수록 깊이 빠지는 진흙처럼. 결코 다른 방법을 통해 해결할 것이 아니라 고민을 근본적이게 해결해야 한다.

* 그 땅에 넘어진 자, 그 땅을 짚고 일어서리.

 그래서 나는 순간을 택했다. 어느새 지나가리. 바람이 한참 불다가도 어느새 멎듯이 이런 순간 역시도 어느샌가 멎어있을 터이다. 그리고 삶에 다시는 없는 순간이다. 그래서 조금 진지하게 고민해보기로 했다. … 

 

 순간의 마음, 순간의 의식. 이런 생각이 머리를 가득 덮었다. <순간>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크고 거대하지만 추상적으로 맴돌았는데 김창완밴드와 가을방학의 노래를 듣고 구체화되었다.(그리고 언니네이발관까지!) 무엇을 하든지 순간이 떠올랐다. 지금은 조금 힘들어도 이 경험으로부터 발전된 미래의 순간이 올 꺼야. 아니, 순간 나는 발전한다. 이런 생각들로 가득했다. 작년 12월 시집을 대량 구매했었는데 3권 읽고 버려두었다. 순간의 미학에 빠진 내게 이 책은 읽을 수밖에 없는 제목이었다.

 

 그 누구의 추천도 없이 우연히 구매한 시집인데 흠뻑 젖을 수밖에 없다. 특히 <순간>에 대하여. 제목도 없는 작은 녀석들 하나하나마다 의미도 있지만 녀석들이 모여서 나타나는 의미도 있다. 합쳐져 발산되는 의미를 볼 때 녀석들에게 이름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녀석들이 아니라 하나의 음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시에서 묘사하고자 하는 순간, 그 순간이 동시성을 지니고 있다. 보편성과 현재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 시집에 있는 100여 개의 작은 시편들 각각이 동시에 그려진다. 어느 한 쪽에서는 개구리가 울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민들레씨가 세상으로 날아간다. 또 어떤 곳에서는 거미줄에 이슬이 맺혀있고 저쪽에서는 풀잎이 비를 맞으며 춤을 추고 있다. 이런 순간의 이미지들을 짧은 문장으로 현실성과 감동을 주며 그려낸다. 그래, 시를 읽으면 세상을 바라보는 느낌이 든다. 책상에 앉아 비 오고 민들레씨 여행 떠나고 쓸쓸한 호수와 겨울 바다를 만날 수 있다. 작은 시편을 통해 순간순간으로, 시 한 편 한편마다 순간의 꽃을 피운다.

 

 시를 읽고 나서 내가 숨 쉬고 있는 세상의 순간적인 모습을 자주 상상한다. 아침에 일어날 때면 멀리 있는 가족을 떠올린다. 엄마는 밥을 짓고 아빠는 출근하시고 동생은 자겠지. 해는 이미 제법 떠올랐고 달은 보이지 않겠구나. 그런 평행의 순간들에 대해 상상한다. 시선이 자아에서 세상으로 넓어진 느낌이다.

 

 시집을 다시 읽은 것은 시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계속 생각났다.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이 시집을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시편 하나하나도 좋지만 개인적으로 시집을 읽어 순간의 꽃의 향기를 맡는 것을 추천한다.

 

*

오늘도 누구의 이야기로 하루를 보냈다.

 

돌아오는 길

나무들이 나를 보고 있다

 

*

누우면 끝장이다

앓는 짐승이

필사적으로

서 있는 하루

 

오늘도 이 세상의 그런 하루였단다 숙아

 

*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

바람에 날려가는

민들레씨만 하거라

늦가을 억새 씨만하거라

 

혼자 가서 한세상 차려보아라

 

*

이 세상이란

 

여기 나비 노니는데

저기 거미집 있네

 

*

헐렁한 바지 입은 아버지가

아들의 도시락 가지고

육교에 올라간다

 

인구 5만의 읍내 초등학교 부근

 

*

고양이도 퇴화된 맹수이다

개도 퇴화된 맹수이다

나도 퇴화된 맹수이다

 

원시에서 너무 멀리 와버렸다

우리들의 오늘

잔꾀만 남아

 

*

답답할 때가 있다

이 세상밖에 없는가

기껏해야

저 세상밖에 없는가

 

*

겨울바다에는

헤어진 사랑이

가거라

지금 뜨거운 사랑보다

지난달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이

가거라

 

*

비 맞는 풀 춤추고

비 맞는 돌 잠잔다

 

*

걸어가는 사람이 제일 아름답더라

누구와 만나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제일 아름답더라

솜구름 널린 하늘이더라

 

*

실컷

태양을 쳐다보다가 소경이 되어버리고 싶을 때가 왜 없겠는가

그대를 사랑한다며 나를 사랑하였다

이웃을 사랑한다며

세상을 사랑한다며 나를 사랑하고 말았다

 

시궁창 미나리밭 밭머리 개구리들이 울고 있다

 

5.14.

순간의 꽃.

내게만 순간이 있는 건 아니다.

 

 

---

순간의 꽃

저자

고은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01-04-3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1958년 현대문학에 봄밤의 말씀, 눈길, 천은사운 등을 추천받...

글쓴이 평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