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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의 이상과 현실의 차이,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책 2013. 4. 20. 20:10반응형
4.18. - 4.19.
홍세화 -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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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 다시 읽기 중 하나. 많은 영향을 받았고 느낀 점도 많았던 책이다. 이번에 읽을 때는 글쎄. 크게 와 닿지 않았다. 그간 내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자신에 대해 많은 부분을 돌이켜보게 한 책의 가치가 퇴색되었을까. 지금은 알 수 없다.
책을 읽으며 인상적인 부분에는 포스트 잇 플래그Flag를 붙여둔다. 그래서 저번에 읽었을 때 나에게 소중하게 읽힌 부분이 기록되어있다. 특히나 이번에 책이 와 닿지 않는다고 느낀 점은 10개가량 붙어있던 플래그 중 2개만이 여전히 가슴을 적시고 다른 내용들은 조금 좋은 정도로 읽혔다. 당시보다 조금은 성숙해졌나 보다. 이렇게 생각하면 기쁘고 반대로 저번과 달리 얕게 읽은 것 아닌가 생각에 아쉽기도 하다. 이번에 못 느낀 감동은 다음에 읽을 때 느껴야지.
이 책은 부대 독서실에 있던 책이다. 나는 혹여나 이 책이 금서가 아닐까 무서워 빨리 읽게 되었다. 저번과는 달리 작가가 망명자가 된 부분이 눈에 깊이 들어왔다. 나로서는 당황스러웠다.(찾아본 결과 아닌듯 하다)
작가는 유약해 보이면서도 강단 있게 행동한다. 그런 의외의 모습이 인상 깊다. 이국에서 택시 운전을 하며 돈 안 내고 튀는 애들 잡거나, 자기 맘대로 할인하는 독일인에게 똥이라 말하는 그리고 이병일 때 병장에게 으름장을 놓은 것도 인상깊다. 그런 모습이 전혀 예상되지 않는다.
사실 이 책이 내게 유효하게 느껴지는 것은 작가와 나를 일부 동일시함에 있다. 머리만 믿고 육체노동을 꺼리는 태도. 나는 그래서 게으르고 겁쟁이다. 사람들 간의 갈등을 두려워한다. 활발하기도 하고 무슨 활동 때는 앞서지만 갈등의 상황에서는 위축되곤 한다. 그리고 아르바이트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런 약점을 작가가 극복하는 모습이 신기하였다. 마치 연극을 하듯이.
머리만 믿고 육체노동은 꺼리며 갈등을 싫어하는 태도는 이 책에 나오는 <개똥 세 개> 이야기로 치자면 나 스스로에게 똥을 먹이는 셈이다. 어떤 행동을 실행하였을 때 나타날 결과가 두려워 말하지 못하면 결국 그 책임과 후회는 온전하게 내 몫이 된다. 나 스스로 그런 똥을 많이 먹으며 지내왔다.고 생각한다. 용기가 없어서.
12월부터는 복싱을 배울 예정이다. 갈등을 두려워하는 태도를 바꾸고 싶다. 그러나 복싱을 배운다고 태도가 바뀔지 모르겠다. 결국 나의 유약함을 물리적인 파괴력으로 채우는 것이므로, 나보다 강한(강해 보이는) 물리력을 가진 대상에게 여전히 그대로 아닐까? 그래도, 그렇더라도 배워야 한다. 조금씩 공포를 이겨나가기 위하여. 지금도 조금씩 해나가야 하며, 앞으로는 당당해야 한다.
작가가 말하는 증오의 고리를 키우는 방법이 될까? 그렇지는 않을거다. 아무래도 나는 폭력을 휘두르는 스타일이 아니다. 상대에게 위협을 가해 서로 대등치 못한 입장에서 시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적어도 스스로에게, 남이 먹어야 할 똥을 먹이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개똥 세 개 이야기는 훈장과 세 명의 제자 이야기다. 제자들은 서로 형제다. 훈장이 제자들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하자 첫째는 영의정, 둘째는 장군이라고 말하니 훈장은 좋아한다. 그러나 셋째는 꿈은 제쳐두고 개똥 세 개가 있으면 좋겠다고 한다. 훈장이 이유를 묻자 자신보다 생각이 짧은 큰 형이 영의정을 한다니 똥 한 개를, 겁쟁이인 작은 형이 장군이 된다닌 똥 한 개를 먹이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듣고 좋아하는 훈장에게도 한 개 주고 싶다고 한다. 훈장에게 개똥을 주고 싶다 말하기 전에 셋째는 잠시 고민한다. 그래. 여기서 말하지 못하면 그 똥은 자신의 차지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런 똥을 먹기 싫다.
나는 이방인의 이미지가 좋다. 유유자적한 분위기. 세상보다 자신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냄새가 좋다. 그래서 블로그 이름도 L'Étranger이고 구름따라나그네라는 필명도 가지고 있다. 저자 역시 그랬다. 보를레르의 시나 까뮈의 글을 읽고 이방인의 이미지를 원했다. 그러나 막상 진짜 세상의 이방인이 되어보니 진실로 고독하다고 한다. 나 역시 그런 상황이 온다면 이겨낼 수 있을까?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내 소신과 신념에 맞게 행동할 수 있을까? 나 역시도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방랑자와 이방인의 모습에 취해 있는지 모른다. 그래도 좋다. 여전히 구름따라 걷고 싶다. 나그네이고 싶다. 이방인으로서 모두에게 평등하고 싶다. 객관적이고 싶다.
내 삶의 모습이 소설 속의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이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내 삶에서는 주인공이다. 까뮈의 「에뜨랑제」에서 주인공 총에 맞아 죽는다는 아랍인이라 해도 그 이름없는 아랍인 역시 자신의 삶에 주인공이다. 그래, 나는 방랑하고 싶다.
작가의 삶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 다른 사람을 다 속일 수 있어도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다는 것.
앞서 일부러 단단하게 말했으나 그 말을 곱씹을수록 나는 나 스스로를 속이고 있음을 느낀다. 확신할 수 없기에 아직 내 삶의 태도를 확정 짓지 못했기에 그래서 더욱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그 단정적임이 내가 흔들리는 것을 알려준다고.
시간이 남으신 당신은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작은 습관. 작은 습관을 키울 것이다. 사소한 부분을 바꿀 것이다. 평소 겉과 속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한다. 겉모습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고 속마음은 우리가 키워온 것이다. 겉표현은 자신을 알 수 없고 가슴진실은 표현할 수 없다. 결과는 단번에 알 수 있고 과정은 이해해야 알 수 있다. 왜 더욱 힘들고, 가꾸기 어렵고, 가치 있는 것이 무시받고 표면 이후에 평가받게 될까. 겉은 손바닥만 한데 하늘만 한 속마음이 손바닥에 의해 가려질까. 그런 가슴 아픔에 알 수 없는 외로움을 느꼈다. 그래서 조금씩 외면을 바꾸고자 결심했다.
p. 61. 나는 그 어처구니없는 모함을 씹어삼켰다. 아무도 비판의 소리를 하지 않는 것에 놀라기도 했지만 서글픔이 앞섰다. 드디어 나의 분노가 폭발했던 것은, 만약 내가 돈이 많거나 학위라도 갖고 있었다면 그렇게 쉽게 모함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나의 처지는 나의 의식만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대하는 다른 사람의 의식도 규정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의식은 나만 규정하는데, 나의 처지는 나의 의식뿐만 아니라 남의 의식도 규정한다. 조금씩 변화하려한다.
4. 19.
파리에 가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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