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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같은 찬란함, 피천득의 「인연」
    2013. 4. 20.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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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0. - 4.12.

    피천득 - 인연

     

     

     

     

     

     

     

     

     

     

     2006년, 중학교 3학년이 되며 이 책을 샀다. 내 뜻으로 산 건 아니다. 당시에 다니던 학원에서 논술을 배우기 위해 구매했다. 선생님께서 바쁘셔서 수업은 2~3번 정도만 하고 흐지부지되었다. 책을 읽으며 서로 느낌을 공유하는 것이 수업이었다. 어쩔 수 없이 감상과 독서 모두 온전하게 나의 몫이 되었다.

     그동안 5번 정도 읽었다. 중3 때, 고등학생 때 두 서너 번, 대학생 때 한 두 번, 그리고 지금에 한 번 더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가 기억난다. 센티멘탈sentimental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아호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키츠가 누군지도 모르고 워즈워스, 프로스트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찬란한 시절>과 <은전 한 닢>을 좋아했다. 이유는 없었다. 그저 마음에 다가왔다. 지금에서야 중3 때의 마음을 떠올리기 쉽지 않다. 일기가 있었다면... 아쉬울 따름이다.

     고등학생 때 읽었던 기억도 난다. 처음으로 여자친구가 생겼다. 이상하게도 그 아이 앞에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을 이리저리 더듬었다. 아무리 더듬어도 화젯거리가 나오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해 질 무렵에, 보통 나는 이야기를 들었다. 집에서 「인연」을 읽다 보니 <이야기>라는 수필이 있었다. 내가 말이 적어지는 것이 경험이, 지식이 부족해서 그렇구나 생각했다. 그 아이는 미국에서 중학교 생활을 하다 와서 나와 경험치 차이가 크게 났었다. 그때는 <이야기>와 <맛과 멋>을 인상깊게 읽었다. 사춘기이긴 했나보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도서관에서 읽을 기회가 생겼다. 대 여섯 장 읽다가 그만두었다. 적당히 낡고 적당히 손때가 묻고 인상 깊게 읽은 수필이 있는 쪽은 더욱 눌려 펴지던 내 책과 느낌이 너무 달랐다. 아무래도 나와 인연이 아니었다. 후에 집에서 책을 가져와 읽었다. 당시는 서장이 인상 깊었다. 산호와 진주 이야기를 보며 삭막한 서울보다 바닷가가 있는, 몽돌 해안의 울산이 그리워졌다.

     읽고 나서 그 당시 여자친구에게 읽으라고 전해주었다. 읽었는지...어떤지는 모르겠다. 내 소중한 추억이 담긴 책이었다. 나와 가장 오래 지낸 책. 그래서 나를 보여줄 수 있다 생각했다. 인연이 아니었는지 여러 이유로 헤어졌다. 다행히 이 책은 인연이 이어졌다. 헤어지며 그녀가 내게 돌려주었다. 받을 당시에는 그 아이의 체취가 강하게 베어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읽는다. 언제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세상의 빛과 어둠마저도 각자의 눈과 머리로 흡수해서 인식하는 게 인간이다. 인간은 주관적인 존재다. 가끔은 항상 변화하는 내가 싫지만 읽은 책을 또다시 읽게 될 때면 행복하다. 읽었던 책이지만 새로운 면과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 책이 질리지 않는다는 게 존재의 주관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인연」, 이 수필집은 수작이다. 작가처럼 표현하자면 금강석처럼 빼어나진 않지만, 은처럼 질리지 않는 매력이 있다. 녹슬지 않는 매력이 있다. 그런 잔잔함이 있다. 문장이 짧다. 필요한 성분만 들어있다. 그러나 깔끔하다. 청초하다. 그리고 센티멘털하다. 이런 글을 쓰고 싶다. 괜히 수사적이고 비유가 가득 담길 필요는 없다.

     

     이번에 읽으며 작가의 새로운 면은 많이 느낀 것 같다. 이야기를 즐겼고, 술을 못 마시고, 요정에도 다니고. 그런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눈에 들어온 세 작품은 <맛과 멋>, <이야기>, <여린 마음>이다. 읽으며 나이가 많아도, 사회적 성공을 얻어도, 아름다운 문장을 알고 쓸 수 있어도 여전히 인간은 인간이구나 생각되었다. 내가 느끼는 고민들. 특히 흔들리는 마음이 언젠가는 사라지리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 계속해서 가지고 가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 더 단단히 마음먹을 수 있게 되었다. 언젠가 마음의 풍랑이 멈출 때, 아니면 비바람 피할 곳 생길 때로 미루던 일들이 있었다. 그런 일은 평생 못할 테다. 스스로 해야 한다.

     작가가 후회하는 것 중 하나가 평생 남의 이야기를 들으며 산 점이다. 번역가로서, 문학 교수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번역가도 교수도 아니다. 내 젊음에는 나만의 삶이 필요하다. 책을 통해 지식과 간접경험 쌓는 것도 필요하지만 직접경험도 필요하다. 균형. 지금은 불균형이다.

     읽으며 이런 것들을 생각했다. 몇 해 전(2007) 작가님께서 돌아가신 기사를 보았다.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에서야 가슴이 아프기 시작한다. 책에서 천당에 가더라도 잠이 없으면 소용없다는 수필이 있다. 잠이 들 수 있는 곳으로 가셨길. 죽음이라는 영원의 잠이 축복이길.

     

    p. 205 <이야기> 中

     "말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라는 격언이 있다. 그러나 침묵은 말의 준비기간이요, 쉬는 기간이요, 바보들이 체면을 유지하는 기간이다. 좋은 말을 하기에는 침묵을 필요로 한다. 때로는 긴 침묵을 필요로 한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이 아니요, 농도 진한 말을 아껴서 한다는 말이다. 말은 은같이 명료할 수도 있고 알루미늄같이 가벼울 수도 있다. 침묵은 금같이 참을성 있을 수도 있고 납같이 무겁고 구리같이 답답하기도 하다. 그러나 금강석 같은 말은 있어도 그렇게 찬란한 침묵은 있을 수 없다.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은 말로 이루어지고 말로 깨어졌다.

     

     

    4.12

     


    인연

    저자
    피천득 지음
    출판사
    샘터사 | 2007-12-2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시인이자 수필가인 피천득 선생의 수필『인연』개정3판. 이 책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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