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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무엇을 잃어가는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2012. 12. 8.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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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실의 시대: 원제 노르웨이의 숲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문학사상사 | 2010-07-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상실의 시대를 지나는 세상 모든 청춘을 위해!일본을 뛰어넘어 세...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12. 11. 23. - 12. 11. 26.

    무라카미 하루키 - 상실의 시대

     

     

     

     

     

     

     

     

    신기한 일이다. 주인공이 크게 변화하는 시기에 책을 읽게 되었다. 과거 17살 때 한번 읽고, 현재 22살이 되어 다시 읽엇다. 17살의 나와 22살의 나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 22살인 지금 나는 성인으로서, 어른으로서 책임을 지며 살아가고 있는가.

     

    책임, 우습게도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의 소설의 핵심 키워드가 책임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책임. 그리고 이 것을 상실함과 상실의 슬픔을 채워주는 새로운 책임. 이러한 것들이 꾸준히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삶이다. 추억이 떠오르면 생각에 잠기고, 슬프면 울고, 힘들면 치유받고, 지저분하면 치우고, 부족하면 채우고, 지독하게 외로우면 혼자 여행을 떠나고, 쓸쓸하더라도 답장 없는 편지에 기대는 것. 가지고 있어도 마음에 남지 않는 것과 사라지더라도 마음 속에는 남아 있는 것. 이러한 '것'들이 우리 삶을 구성하는 것.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인만큼 내가 떠나보낸 사람들과 시간들에 대해 떠올렸다. 20여년의 짧은 세월을 살았지만, 20여년의 짧은 시간을 보냈고 그 속에는 수많은 추억과 사람들 역시 담겨있다. '죽을만큼 힘들다.'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사는 것이 매일 매일 천국을 갈 정도로 기쁘진 않았지만, 그저 살아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삶을 지속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다. 작가는 삶과 죽음 중에 죽음을 택하면 모든 책임을 내려 놓는 것이고, '사는 것'을 택하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저야 한다고 등장인물은 통해 이야기한다. 이 글을 적으며 숨을 내쉬는 순간마저도 내 책임역시 숨쉬고 있다.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책임, 살아있음을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 매 순간 살아있는 것 역시 나의 선택인가. 선택에는 당연히 책임이 따른다. 작가가 이런 판단을 하게 된 것은 삶과 죽음을 같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떄문이다.

     

    p. 413

    기즈키가 죽었을 때, 나는 그 죽음에서 한 가지를 배웠다. 그리고 그것을 체념으로 익혔다. 혹은 익혔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런 진리였다.

    "죽음은 삶의 대극對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잠재해 있는 것이다."

    확실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동시에 죽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만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어떠한 진리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 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는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혼자서 그 밤의 파도 소리를 듣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매일처럼 골똘히 그런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위스키를 몇 병씩이나 비우고, 빵을 씹고, 물통의 물을 마시고, 머리를 모래투성이로 만든 채, 배낭을 메고 초가을 해안을 서쪽으로 걸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동시에 죽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과 죽음을 동시에 키우기에 언제든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태엽감는 새와 비슷하게 주인공은 사회에서 성공하는, 존경받는 인물인 나가사와 선배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있다. 모든 일에 성공적이고 그러한 성공을 당연하듯이 바라보는 시선과 그에 걸맞는 강철같은 의지를 가지고 있다. "타인과 나"를 구분해서 볼 수 있는 점이 주인공과 비슷한데, 이 둘의 삶의 방식은 너무나도 다르다. 슬픈일을 슬퍼할 줄 아는 것. 무엇인가 잘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을 잊기도 하고  희생을 해야한다. 주인공 역시 이사를 하고 나서는 주변 정리를 위해 3주동안 한 가지만을 바라보고 살았으니까. 심지어 나오코마저도.(p.371관련내용.)

     

    나가사와 선배라는 등장인물은 평생을 이렇게 사는 것처럼 보인다. 목적과 목표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 그래서 목적·목표가 있는 한 타인의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상처받지도 않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나는 내가 가끔 알 수 없는 이유로 힘들고 우울한 것이 싫지만 이런 감정을 느낄 사이도 없는 삶이야말로 견딜수 없을 것 같다.

     

    나가사와는 그렇기에 자신밖에 모른다. 타인의 이해라는 것이 필요없다. 오직 자신의 목표에 맞게, 목적에 따라 살아간다. 자신을 동정하지 않는다. 타인은 타인이고, 자신은 자신이다. 그래서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 작가는 '누군가에게 올바르게 이해받기를 바라는 것'을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나가사와는 결국 사랑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올바르게 이해받기를 바라는 것', 정마로 아름다운 것이다. 소중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이해받을 필요가 있나?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타인은 타인이고, 자신은 자신이어야 한다. 이해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의 손에 우리의 모습이 결정된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모습이 그렇다. 유행에 민감하고, 연예인들이 넘치며, SNS를 통해 깊은 관계도 아닌 사람들과 매일 연락을 해야하는 것 그리고 타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비교하며 자신을 동정하게 되는 것. 이러한 모습들을 지니고 있지 않는 와타나베(주인공)가 이 시대에 바로 서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 같다. (물론 사랑으로인해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통해 더욱 인간적이라고 느낄 수 있다)

     

    사랑받는 것을 '누군가에게 올바르게 이해받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다시 정의한다면, 사랑하는 것은 반대로 '누군가를 올바르게 이해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이 사랑을 나누는 것인가. 돌이켜보건데,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면 연애는 하더라도 사랑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서로 오해 없이 진솔한 대화가 필요했던 것이고, 한 사람만 말하고 한사람만 이해하는 것은 사랑의 차원이라고 할 수 없다.

     

    p. 8 서문 중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제가 여기서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이 소설의 간명한 테마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와 동시에 한 시대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라는 것을 그려 보고 싶었습니다.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自我의 무게에 맞서는 동시에, 외부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참 가슴 아픈 말이지만, 누구나 그 싸움에서 살아 남게 되는 건 아닙니다.

     

    책을 펼치며 서문을 읽을 때 이해가 가지 않았던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내면을 포용할 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고 있는 책임을, 환경들까지 껴안아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람은 위대하고 어려운 것이구나.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살아있음'을 '삶'을 선택한 것이다. '삶'의 과정중에 발생하고 수많은 사건들과 떠나가는, 이해해주고 싶은, 이해받고 싶은 사람들로 인한 상실은 피할 수 없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견뎌야하는 책임이 아닌가. 이러한 책임 역시 언제나 슬플 수 밖에 없고 아플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또한 이해받으며, 이해해주면서 치유·재생될 수 있지 않을까. 이 것이 흘러가는 삶 아닌가. 그리고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내용인가보다.

     

    의문. - 나오코의 태도를 보며.(근본적으로 나오코가 말이 안나오는 것이 문제이지만)

    마음의 문제를 우리는 '혼자있는 시간'을 통해서 치유할 수 있을까?

    오히려 다수多數와 이야기하고 나눌 수 있을 때 치유되는 것 아닐까?

     

     

    p. 16.

    그때, 나는 나 자신의 일을 생각했으며, 내 곁에 바짝 붙어서 나란히 걷고 있던 아름다운 한 여인에 관한 생각을 했고, 나와 그녀에 관한 일을 생각했다. 그리고 또 나 자신에 관해 생각했다. 그때는 무엇을 보든, 무엇을 느끼든, 무엇을 생각하든, 결국 모든 것은 부메랑처럼 자기 자신에게도 되돌아오는 나이였다.

    나는 지금 그런 나이인것 같다.

    p. 24.

    아주 오래전, 내가 아직 젊고 그 기억이 훨씬 선명했던 무렵, 나는 그녀에 관한 글을 써보려고 시도한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 단 한 줄도 쓸 수가 없었다. 첫 한 줄만 나와 준다면 그 다음은 무엇이든 술술 써지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 한 줄이 아무리 애써도 나와 주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나 상세한 지도가, 선명함이 지나쳐 때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젠 나도 알게 되었다. 결국 따지고보면 - 하고 나는 생각한다- 글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건, 불완전한 기억이나 불완전한 상념밖엔 없다는 것을.

     

    p. 203.

    그 사람은 너와 있을 땐 언제나 그랬어. 자기의 약한 면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지. 너를 아주 좋아했던 것 같아, 그 사람. 그래서 자신의 좋은 면만을 보이려고 노력했어. 하지만 나와 단둘이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어. 어깨 힘을 좀 뺐지. 사실은 성격이 변덕스러운 편이었거든. 가령 혼자서 한참을 주절거리다 싶다가도 다음 순간엔 울적해지고. 그런 일이 자주 있었어. 어릴 적부터 그랬는걸. 하지만 늘 자신이 달라지도록, 더 나아지도록 노력했어.

    늘 자신이 달라지도록, 나아지도록 노력했는데, 그게 잘 안되면 짜증을 내거나 슬퍼했어. 몹시도 훌륭한 것, 아름다운 것을 지니고 있었는데, 결국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지 못해서 이것도 해야하고 저것도 바꿔 봐야지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어. 생각해보면 가엾어, 그 사람.

     

    p. 324.

    '와타나베와 내가 닮은 점은, 자신의 일을 타인이 이해해 주길 바라지 않는다는 거야. 그게 다른 녀석들과 다른 점이야. 다른 녀석들은 모두 자신의 일을 주위의 인간이 알아주기를 바라며 안달하지.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고 와타나베도 그렇지 않아. 이해해 주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는거야. 자신은 자신이고, 타인은 타인일 뿐이라고.'

    '나는 그만큼 강한 인간이 아녜요. 어느 누구에게 이해받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죠. 서로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상대도 있어요. 다만 그밖의 사람들에겐 어느 정도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고 있을 뿐인 걸요. 체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배님 말대로 남에게 이해를 받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죠.'

     

    p. 379.

    하지만 난 그녀를 절대로 버리지는 않을 생각이다. 나는 그녀가 좋고 그녀보다는 내 쪽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지금보다 더 강해질 거야. 그리고 성숙해질 거야. 어른이 되는 거야. 그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지.

    난 지금까지는 그럴 수만 있다면 열일곱, 열 여덟인 채로 있고 싶었어.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는 십대 소년이 아니니까. 난 책임을 느낀다. 아아, 가즈키, 난 너와 함께 있었을 때의 내가 아냐. 난 이미 스무 살이 된 거라구. 그래서 난 계속 살아가기 위한 대가를 치러야만 해.

     

    p. 401.

    온 세게 정글 속의 호랑이가 모두 녹아 버터가 되어 버릴 만큼 좋아.

    어떻게 마음속에 이런 언어들이 떠다닐까. 아름답다. 정말.

     

    2012. 11. 26.

    이해해주고 싶고, 이해받고 싶은.

     

    상실의 시대무라카미 하루키(Haruki Murak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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